저는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이미 수십 년이 지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을 돌아볼 기회는 많지 않은데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럴 때가 종종 생깁니다. 내가 이런 돌봄을 받고, 이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었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기도 하고요, 제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나중에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구나 하는 걸 어렴풋이 예상해 보기도 합니다.
정작 제가 자라면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 중에 지금에 와서 새삼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어린이 콘텐츠입니다.
영유아 시기에 ‘핑크퐁'과 ‘뽀로로’, ‘타요'로 대통합되어 있던 아이들의 취향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갈리기 시작해서, 남자아이들은 ‘카봇', ‘미니특공대'를 보고, 여자아이들은 ‘캐치! 티니핑'과 ‘시크릿 쥬쥬'를 좋아하기 시작한다고들 합니다.
저는 소위 ‘여아용 콘텐츠'로 분류되는 ‘캐치! 티니핑’과 ‘시크릿 쥬쥬를’ 아주 싫어했어요. 짧은 치마나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한껏 공주 꾸밈을 한 주인공들이 어깨를 들썩이고 한쪽 발을 뒤로 깡총 든 채로 뱅글뱅글 돌며 변신을 하는 모습이 그다지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주인공들은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머글'인 동네 오빠를 향한 애교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고,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소녀’로 묘사가 됩니다. 마법에 사용되는 소품 역시 팩트나 거울, 요술봉 같은 아기자기한 것들로, 마법의 힘으로 해결하는 문제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이나 이웃을 돕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악당에 맞서 지구를 구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컨셉의 남아 콘텐츠와는 스케일이 다르죠.
언제나 ‘중성적’으로 키우려 애쓰던 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 딸은 ‘캐치! 티니핑’을 열렬히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허공에다 ‘츄~’를 날리고 요술봉을 휘둘러 변신을 하는 데에 몰두하는 아이를 보며 ‘아..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죠.
종종 그런 말을 듣곤 합니다.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녀가 취향이 갈리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역시 남자아이들은 로봇과 공룡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들은 인형과 공주를 좋아하는 게 본능인가 보다고요. 저는 의아해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동안 저는 ‘캐치! 티니핑' 대신 ‘옥토넛’이나 ‘로보카 폴리’와 같은 콘텐츠를 보도록 유도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캐치! 티니핑'보다 더 낫다고 판단했던 콘텐츠의 주인공이 모두 남자라는 것을 깨닫고 더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바나클 대장, 폴리, 타요, 뽀로로, 호기는 모두 남자예요. 물론 여자 캐릭터도 등장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꽤 비중 있고 ‘괜찮은'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하지만 콘텐츠의 제목부터 ‘뽀로로'이고 ‘로보카 폴리'고 ‘타요'인 걸요.
타요를 좋아하던 때의 아이를 떠올려 보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타요와 라니였어요. 로보카 폴리에서는 폴리와 앰버를 좋아했습니다. 여자캐릭터 하나,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였습니다.
어린아이는 3살만 되어도 본인의 성별을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동일한 성별의 인물에 조금 더 이입을 하며 모방을 하려는 성향도 나타나고요.
어쩌면 제 아이는 드레스와 리본과 분홍색 이전에 처음으로 등장한 여자 주인공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여자 캐릭터가 그저 분홍색을 띤 보조인물로 등장하는 콘텐츠인가? 과연 뭐가 더 나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1989년부터 2018년까지, 지난 30여 년 동안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110편의 영화 중 단 21편만이 여성 캐릭터를 주역으로 포함했다고 합니다.
도서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겟 독자 연령이 낮아질수록 여성 주인공의 수도 줄어듭니다. 12세에서 18세까지를 겨냥한 작품 중 65%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9세 ~ 12세는 36%, 어린이 문학에서는 31%만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고 해요. 우화에서는 주연을 맡은 동물캐릭터가 여성인 경우는 7.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출처: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백설희/홍수민 지음, 들녘 출판사).
아동 콘텐츠 시장에서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아이들은 소녀가 주인공인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지만 여자아이들은 누가 주인공인들 개의치 않는다고 합니다. 여자아이들이 공감능력이 훨씬 뛰어나서는 아닐 거예요. 나와 성별이 다른 주인공과 보조 캐릭터 사이에서 갈등하다 남자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며 콘텐츠를 소비하던 경험에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옛날(?) 피구왕 통키와 축구왕 슛돌이에 열광했듯이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40여 년간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같은 말이 제 아이 안에도 심기길 바라지 않아요.
너는 주인공이 될 수 없어.
있는 줄도 몰랐지만 마음속에 콕 박혀버린 말이 있진 않나요? 있다면 꺼내서 확 버려버립시다.
체력이 늘어나는 슈퍼파워를 꿈꾸는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