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 좋아하세요?
어려서는 사랑이라는 게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대한 미스터리 같은 힘이 작용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 거라고요. 사람은 그저 그 힘에 굴복당할 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같은 사랑, 영원한 사랑, 영혼의 단짝 같은 말에 혹하곤 했죠.
사랑이 뭔지 모르면서, 아니 몰랐기에 더더욱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멋대로 정의 내리는 말에 휘둘리곤 했습니다.
외로워서 하는 사랑은 진짜가 아니야, 상대의 조건을 보고 하는 사랑은 진짜가 아니야,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네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사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그 기준으로 저와 상대방의 감정의 ‘진위’를 평가해 보려고도 했고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지 노력해서 유지하거나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될 수 없다고요.
그중에서도 유독 낭만적으로 들렸던 말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어요. 사랑은 상대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 진짜라는 말도 괜히 멋져 보여서 다이어리에 적어두었어요.
오래도록 저 말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치명적인 단점 한두 개(수십 개?)쯤은 꽁꽁 숨겨두고 삽니다. 그 모습을 들키고 난 후에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지요. 한때 상대방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나의 모습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변하게 될 테고, 숨겨두었던 단점도 언젠가는 들킬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고작 내가 불완전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떠나가고 말 것이라면, 그건 너무나 가변적이고 보잘것없는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를 떠나지도, 옅어지지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어디까지가 저의 ‘조건’이고 어디까지가 ‘저의 본모습’일까요? 저의 모습과 생각, 저를 둘러싼 조건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데, 미래에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면서 ‘지속적인 사랑'을 약속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얘기일까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대상으로 조부모를 떠올리곤 합니다. 양육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자녀가 어떤 조건을 충족하길 내심 바라는 부모와 대비되는 '조건 없는 사랑'의 대명사처럼요.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는 저를 많이 사랑해 주셨는데요, 제가 할머니 손녀가 아니었어도 저를 그만큼 사랑했을까요? 할머니는 누가 되었든 (그게 제가 아니었어도) 할머니의 손녀라면 사랑했을 거예요. 케잌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훌륭해도 할머니의 손녀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사랑을 주지 않았겠지요.
즉, 나를 ‘나'이게 하는 그 어떤 특징들도 할머니의 사랑의 조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할머니의 손녀이기만 하면 되었던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이든 혈연관계에 포함되어 있다는 조건만으로 무턱대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이 주는 안정감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기준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한 사랑은 불완전하고, 쉽게 변하고, 이런저런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어요. 그 안에는 나를 바꾸는 노력도, 상대방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참고 기다려주는 노력도, 관계의 어긋난 부분을 고쳐나가려는 노력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은 오히려 사랑의 증거처럼 느껴집니다. 위대하고 숭고한 본능으로만 알았던 '모성애'도 노력의 영역이더라고요. 다른 것들은 오죽할까요.
저는 사랑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아요. 뭔가 대단하고, 완전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언가로서의 사랑에 대한 기대는 와장창 깨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랑을 발견하고, 키우고, 소중히 유지해 나가려는 노력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려고요. 사랑하려는 노력,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노력형 사랑꾼 케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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