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제 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줄었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3종류의 성이 있지. 남자, 여자, 아줌마!’라는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이 한 때 유행했지요. ‘중년 여성은 더 이상 성적 매력이 없다'는 의미의 모욕감을 주려는 것이 농담의 목적이었으나, 막상 저는 더 이상 저를 성적 대상화하는 외부 시선이 없다는 사실에 자유를 만끽하는 중입니다.
세상이 저를 더 이상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안도가 되던지요.
20대에는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회사의 랜덤한 미혼 남자직원(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과 ‘한 번 잘해봐'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고, 옷차림, 화장, 외모에 대한 아무 말을 일상적으로 참아야 했어요. 지하철에서, 길에서, 공공장소에서 몸의 경계를 침범해 오는 사람들 때문에 한껏 예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지요.
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외부의 시선만은 아니었어요. 몸에 대해 스스로도 꽤나 엄격했습니다. 언제나 충분히 마르지 않은 것에 대해, 몸의 어떤 부분이 너무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둥글고, 각지고, 튀어나오고, 이상한 모양이라는 이유로 불만이 많았습니다. 노력이 가능한 부분은 바꾸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고, 타고나서 바꿀 수 없는 부분은 부모를 원망하고요.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인지 아니면 저도 이쯤 되니 포기할 건 포기하자는 마음인 건지 지금은 한결 너그러워졌습니다.
거울을 볼 때 늘어난 흰머리와 눈가 주름이 거슬리지만 거울을 안 보고 있을 때는 잠시 잊고요. 잘 입던 바지가 어느새 좀 낀다 싶으면 다른 바지로 갈아입으면 되는 일이고요. 이 정도의 관심이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나이를 묻는 문화' 얘기를 하면서 ‘바디 뉴트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요. 지금의 제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지 않는 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몸에 집착하지 않는 것, 긍정적인 바디 이미지를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어릴 적부터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지 아이를 키우면서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는 본인의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뿐 아니라, 어떤 몸을 사회에서 선호하는지 주변과 미디어를 통해 간접체험합니다.
‘예쁘다’, ‘누구누구는 외모가 완성형이네'라는 말을 늘 듣는 아이들이 있고요, 그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놀이터에서 “과일 먹어야 공주님처럼 예뻐지는 거야"라든가 “너 그러면 못 생겨진다"라는 말로 아이를 달래거나 협박(?)하는 양육자도 자주 보고요. 어린이 콘텐츠에서도 ‘못생긴 주제에!’라는 식의 말이 난무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날씬하고 예쁜 공주님'이죠.
아아.. 얘기를 하자면 끝도 없어요. 그렇게 자랐는데 긍정적인 바디이미지를 갖는 게 더 어려운 일 아닐까요?
얼마 전 누군가 그러는 거예요. 출산 이후 변화한 몸을 보면서 출산이라는 큰 일을 해낸 자신의 몸을 기특하게 생각하기로 했다고요. 세상에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싶었어요.
급작스러운 체중변화에 살이 터지고, 늘어지고, 붓고, 착색된 ‘볼품없는' 몸이 아니라, 충격적인 사건(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 입장에선 꽤나 파괴적인 사건이죠)을 잘 지나서 다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몸이 대견하다고요.
임신과 출산만 대단한 게 아니죠. 40여 년을 매일 같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고, 다음 날 이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여전히 기능하는 제 몸이 대단합니다.
아름답기 이전에 기능하는 것이 몸의 역할이고, 그 역할을 40년이 넘도록 잘 수행하고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죠, 뭐.
덧) 우리 (특히) 어리고 젊은 사람들의 몸을 평가하는 건 (칭찬이라도) 그만하도록 해요.
우리도 지긋지긋했잖아요. :-)
아줌마,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