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번아웃일까?라고 한 번쯤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번아웃이라는 현상이 한참 사회적 이슈로 회자될 때 제 상황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자격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 정도 힘든 것 가지고 번아웃이라고 말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번아웃이게?
‘다들 이 정도는 힘들어',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라는 말이 제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어요.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장시간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독박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힘든 업무 환경이나 유해한 인간관계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는 제가 번아웃을 언급하는 것은 투정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번아웃의 증상을 보인 적도 없어요. 번아웃 경험담을 들어보면 호흡곤란이 왔다든지, 출근길에 갑자기 주체 못 할 정도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든지,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든지, 우울과 무기력이 너무 심해 꼼짝할 수 없다든지… 누가 봐도 심각한 몸과 마음의 증상들이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종종 힘들다고 느낄 뿐, 숨도 잘 쉬고 밥도 잘 먹고 일상생활을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남들도 다 견디고 있는 정도의 어려움이라면 불평 말고 모두 다 이 악물고 버텨야 하는 걸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구시렁거릴 무언가를 찾아내는 저와는 달리 오랜 직장생활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불만을 크게 내비치는 일이 없던 남편이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요.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많이 참고 견뎌왔던 건가 봐. 내가 그때 번아웃 상태였을지도 모르겠어.”
회사를 그만둔 지금, 남편은 비로소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애쓰며 버티고 있었던 건지를 알겠다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잘 견디는 것에 아주 숙련된 노동자일지도 모르겠어요. 견디는 걸 너무 잘하는 나머지 자신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지쳤다는 증상은 생각보다 명확하고 드라마틱한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야 하는 일은 줄일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은 줄이기 싫거든요. 우선순위라는 게 말이 쉽지 선택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힘은 들지만 어찌어찌 버티며 살아온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그게 삶의 기본값이 되거든요.
그러다 얼마 전 제 시선을 잡아 끈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과도한 책임감'과 ‘Pleasure(즐거움, 기쁨)’예요.
‘책임감'은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책임감 앞에 ‘과도한'이라는 수식어를 넣어 볼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 제가 과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경계한 적은 없거든요.
존재가치를 일로 증명해 보이려고 너무 애를 쓴 것은 아닌지,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20% 정도의 완성도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스스로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종종(?) 디테일에 집착하고, 목표지향적이며 자기비판적인 사람입니다. 적고 보니 번아웃이 오기 딱 좋은 성향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좀 힘들지만 견딜만한 정도의 애씀 상태’를 기본값으로 두고 너무 오래 달려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냄비 안에서 서서히 끓여지는 개구리처럼요.
지나치게 애쓰지 않고도 해낼 수 있는 일까지가 저의 능력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부 내려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며 어디 지점에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요.
제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스스로의 기쁨을 추구하는, 어찌 보면 본능에 가까운 행위가 현대 사회에서는 애써서 추구해야 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더라고요.
과도한 책임과도 연결이 되는 이야기인데요. 나이가 들고 점점 책임져야 할 일이나 관계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자꾸만 뒤로 미루고 있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과 책임져야 하는 일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데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기쁨을 위한 행위를 그 앞에 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고요.
퇴근을 하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돌보고(언제나 마음이 급한 것은 덤), 아이스크림이나 쪽쪽 빨며 멍 때리고 있을 시간 있으면 회사 업무를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 보고, 나를 위해 돈을 쓰려다가도 슬그머니 내려놓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왔든 중년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압박 때문이든 다른 사람과 일을 항상 나의 기쁨 앞에 두는 것을 멈추라고 하더라고요. 보람이나 쓸모, 책임 따위는 잠시 잊고 저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가끔은 들춰보고 틈틈이 야무지게 챙겨 보려고요.
번아웃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잘 돌봐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나요?
일단, 여름엔 빙수를 먹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