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제 나이가 금방 떠오르지 않아서 올해가 몇 년도지? 잠시 생각한 다음, 제 탄생연도를 빼고 나서야 나이를 기억해 냅니다. 그러고도 또 계속 잊고 있다가 누가 나이를 물으면 다시 뺄셈을 시작해야 하고요.
요즘도 종종 제 나이를 묻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대답을 하면, 뒤이어 거의 항상
“어머, 그 나이로 안 보여요. 저는 당연히 저랑 비슷할 거라고(혹은 조금 더 선심을 쓴다면) 저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비슷한 말이 따라옵니다.
제 나이를 말한 일이, 혹은 제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필요한 나쁜 소식인 것 마냥 황급히 따뜻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지요.
저는 제 나이로 보이는 것에 큰 불만이 없습니다. 아마 실제로도 그냥 제 나이처럼 보일 테고요. 하지만 위와 같은 위로(?)를 듣고 있으면 나이가 든 것이 조금은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제 인생에서 딱 적당한 시점에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회적 시선을 마주합니다.
이사를 온 이후로 아이가 새로운 기관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 저 역시 아이 친구들의 양육자를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대부분의 경우 제 나이가 가장 많습니다.
말했듯, 저는 제가 아이를 늦게(?) 낳은 것에 대한 후회가 전혀 없습니다. 나이 먹어 육아하려니 힘들다는 얘기는 저도 종종 농담 삼아 하지만 속으로는 육아는 언제 해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저의 노쇠한(?) 몸이 아니었다면 아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잘 키웠을 거란 자신도 전혀 없어요. 저란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정도가 언제나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양육자들로부터 ‘다른 그룹에서는 항상 제가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오늘은 아니네요.’와 같은 말을 들으면 제가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기쁨을 제가 드렸다는 사실에 뿌듯해야 할까요?
저는 이제 다른 사람의 나이를 잘 묻지 않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으로 상대의 나이를 가늠해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새로 알게 되면 자동으로 ‘저 사람은 몇 살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거든요. 39살인지, 40살인지, 41살인지가 구체적으로 궁금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저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가 궁금한 거죠.
저보다 나이가 적다고 말을 낮출 것도 아니고, 높다고 해서 언니오빠라고 부를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것이 궁금한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어 두어 살 나이 차이쯤은 아무렇지도, 궁금하지도 않아 지려면 나이를 좀 더 먹어야 할까요.
마흔을 앞두고 있거나 마흔을 조금 넘긴, 중년의 문턱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나이에 대한 언급을 굉장히 많이 듣게 됩니다. 물론,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고요. 제가 30대 때보다 29살에 더 나이에 예민했듯, ‘마흔!’ ‘중년!’ ‘앞자리가 바뀌었어!’라는 심리적 저항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굳이 ‘마흔로그'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도 마흔이라는 시기가 저에게 커다란 마일스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니까요.
중년이 어때서! 중년도 참 좋아! 정말 좋아! 제일 좋아!라고 외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매일 나이를 상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 ‘바디 뉴트럴(신체중립주의)’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기존의 ‘바디 포지티브(신체긍정주의)’가 신체 사이즈나 나이, 성별, 피부색 등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개념이었다고 하면, 바디 뉴트럴은 자신의 몸을 굳이 사랑할 의무도 없이 그저 외모에 대해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유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합니다.
저의 모든 것을 나이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나이중립주의' 어떠세요?
더 이상 나이 뺄셈을 하고 싶지 않은,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