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저의 별명은 ‘변온동물'이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어요. 겨울이면 당연히(?) 집에서도 도톰한 양말을 신고 있지만 발은 그렇게 호락호락 따뜻해지는 법이 없어서 항상 손으로 꼭 쥐어주거나 오금에 집어넣어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에도 ‘멋 내다 얼어 죽을' 차림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복은 기본이고 옷을 세 겹 정도는 껴입어야 외출할 수 있었어요. 어쩌다 길에서 맨다리를 내놓고 다니거나 패딩 안에 반팔을 입은 젊은이들(?)을 보면 마치 누가 제 뒷덜미로 얼음 한 덩어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몸을 움츠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추위를 견디는 능력은 더 떨어져서 멋이고 뭐고 겨울에 코트를 입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무조건 엉덩이를 덮는 패딩을 입어야 하고, 얇은 가죽부츠 대신 어그를 신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겨울에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요. 그런데 얼마 전, 아직 바람이 차지만 해가 비치던 어느 날에 빼꼼 문을 열고 정원에 나가보았어요. ‘생각보다 안 춥네?’라고 느낀 순간, 엄청난 행복감이 몰려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단숨에, 확실히 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건 적당한 날씨의 바깥공기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저는 날씨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사람이거든요.
날씨와 상관없는 삶을 오래 살다 보니 날씨가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매일 출근을 하던 시절에도 일단 건물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바깥세상과 단절되니까요. 점심도 회사 건물 안에서 먹고, 지하철역도 건물 지하에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맘만 먹으면 바깥으로 10분도 나가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부나, 찜통더위나 강추위나 그건 바깥세상의 일일 뿐, 실내온도는 에어컨과 난방기의 설정온도가 좌우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저에게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지만요.
그런데 저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날씨와 가까운 삶을 살고 있어요. 문을 열기만 하면 바깥이니까요. 엘리베이터도 없고, 아파트 복도도 없고, 공동현관도 없어요. 거실 창을 열면 바로 정원입니다. 그전에는 이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내친김에 손바닥만 한 정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글쎄 앙상한 나무 가지마다 연두색 잎이 삐죽 나와있지 않겠어요? 구근들도 모두 땅 위로 싹을 올렸더라고요! 지난겨울 폭우가 쏟아진 후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땅에 고인 물이 그대로 얼어버리는 바람에 이번 구근은 모두 썩겠구나 하고 상심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동안 찬 바람을 피해 상자 안이나 테이블 밑에서 식빵을 굽던 고양이들도 해 잘 드는 곳에 발라당 드러누워 낮잠을 잡니다. 드디어 한 해가 시작되는 기분이에요.
살면서 랜덤한 것이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저는 늘 왜 겨울의 중간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지가 의아했어요. 봄의 시작에 맞춰 한 해를 출발할 법도 한데, 한 겨울에 무슨 에너지로 새해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괜한 호기심에 달력의 기원에 대해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과 태양태음력의 세계에서 헤매다가 그다지 깨달은 것 없이 검색창을 닫긴 했는데, 한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은 ‘한 해의 시작'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문화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에요.
우리 전통달력은 태양태음력을 기준으로 하는데, 달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 음력이고, 태양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 24 절기예요. 띠는 24 절기를 따라 바뀌므로 입춘이 되어야 띠가 바뀌고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봤어요(음력설과 입춘 사이에 태어난 저는 40년 가까이 저의 띠를 잘못 알고 살았더라고요).
저는 제멋대로 ‘경칩'을 한 해의 ‘진정한' 시작으로 삼기로 마음먹었습니다(어차피 한 해의 시작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면서요). 경칩은 땅속에서 동면을 하던 동물들이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무렵의 절기입니다. 개구리나 저나 어차피 겨울에는 몸도 마음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걸요.
올해는 3월 5일이 경칩이더라고요. 저도 이제 슬슬 몸을 녹이며 한 해를 시작할 준비를 해야겠어요.
어느 순간 신이 나서 앞으로 정원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죽은 잔디를 모두 헤집어서 흙을 한 번 갈아주고, 새 잔디를 심고, 겨우내 집 안에서 답답했을 화분을 모조리 꺼내어 광합성을 시켜주고, 여기에는 작은 나무를 심고, 저기에는 텃밭을 가꾸고… 나무뿌리를 덮어주었던 바크도 걷어내야지. 아.. 근데 바크가 저렇게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곳마다 그 아래에는 고양이 똥이 있겠군…(그 사이 저희 집을 상시로 드나드는 고양이는 톨톨이 말고도 2마리나 더 늘었어요. 그중 한 마리는 며칠 전 제 눈을 똑바로 보면서 바크 아래에 용변을 보더군요..)
새로운 정원 장비를 쓸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선물로 호미랑 낫 받아본 사람, 손!).
다가오는 봄이, 좀 더 따뜻해진 날씨가 여러분에게도 행복감을 안겨주길!
겨울잠에서 깨어난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