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는 실패를 반복하는 것만 같아서 조금 우울했습니다.
프로젝트의 마감이 계속 미뤄졌고, 업무에서 연달아 이슈가 발생하는데 근본적인 해결을 못하고 있으며, 새로 시도해 보려고 했던 일에서는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몇 가지 상황에서 이런 좌절감을 맛보고 나니까, 마치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다 못해 요리를 했는데 살짝 망했다거나(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요리를 했는데 맛이 있는 경우가 드물어요), 새로 산 간식을 길냥이들이 별로 안 좋아하거나, 화분에 심어둔 구근이 뿌리파리의 습격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사실(RIP 프리지어야..)이 제 인생이 하나의 거대한 실패라는 완벽한 증거처럼 느껴졌어요.
적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사건들이 종합적으로 제 기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저는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과는 거리가 좀 있어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렇게까지 놀랄 건 또 뭔가 싶지만, 기대했던 일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예전 여행노트를 다시 들춰보다가 지금의 저에게 딱 들어맞는 글을 발견했어요.
20대 초반 노르웨이를 혼자 여행할 때의 일입니다. 그때도 사람이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여행 당일 늦잠을 자다가 비행기를 놓쳤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시간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여행가방을 낚아채서 곧바로 공항까지 달렸지만 비행기를 놓치고 맙니다(아슬아슬하지도 않았어요).
다행히 몇 시간 뒤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공항에서 구해서 노르웨이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너무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코트를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죠. 얇은 옷차림이었고, 노르웨이는 겁나 추웠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구구절절한 사연을 요약하자면,
코트 없이 늦은 저녁 노르웨이에 도착 > 호텔 예약 안 함 > 공항과 기차역에서 쫓겨남 > 잘 곳 없음 > 기차역 앞 광장 핫도그 키오스크에서 밤샘 > 계획에 없던 비행기표 지출로 거지됨 > 날이 밝자마자 길거리에서 가장 싼 외투를 삼 > 해그리드(해리포터 참조) 같은 행색으로 다님 > 다음 날 호스텔 날짜 예약 잘못함 > 맘씨 좋은 주인이 봐줌 > 드디어 숙소 제대로 예약함 > 놀다가 막차 끊겨서 숙소 못 감 > 첨 보는 사람이 먹여주고 재워줌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는 것 치고는 저는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에 대해서는 손에 꼽을 만큼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그 여행을 마치고 이렇게 적었더라고요.
“삽질로 시작해서 스스로에 대한 저주와 욕지거리를 허공에 뿌리며 도착한 노르웨이에서의 기억은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가득 찼다. 계획한 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 바라고 바라던 것을 놓쳤을 때, 나는 여전히 실망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술을 마시며 세상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지만, 그것이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를 현재의 내가 판단하고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하고, 사소한 실패에도 인생이 망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반면에, 일이 어그러졌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미래의 나는 어떻게든 잘 해결해 줄 것이다. 비행기도 놓치고 반팔차림으로 다음 비행기에 올랐던 나를 해그리드 외투를 걸친 내가 잘 보살펴 준 것처럼.”
물론 나중에라도 반팔을 입고 겨울 나라에 가는 일은 가급적 없어야겠지만요…
길게 보고 멀리 보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재의 제가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일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며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저 어떻게 흘러갈지 편안하게 구경하는 마음도 조금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프로젝트는 사실 급하게 마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혼자 무리하는 중이었고요, 업무에서 발생하는 이슈도 천천히 이것저것 고려하며 잡아가는 중입니다. 새로 시도하는 일은 어쩔 수 없죠. 한번 지켜보는 수밖에요.
아니 근데 새로운 냥이 간식은 왜 안 좋아할까요?
케잌 드림
덧) 어느덧 마흔로그 뉴스레터를 보낸 지 꼬박 1년이 되었어요. 그동안 계속 읽어주시고, 응원의 메시지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뉴스레터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구경하다 보면 어딘가에 가닿겠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