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짜로, 재미있어하는 일이 뭐예요?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동안 인류가 달성한 어마어마한 생산성과 효율성 증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노동시간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많이 일하고 끊임없이 피곤한 이유가 뭘까에 대한 책이에요. 저자는 그 원인을 ‘가짜 노동'에서 찾고 있어요.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거나 노동자에게 의미 있는 행위로써의 노동이 아니라 ‘일을 위한 일'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애써 얻어 낸 ‘목표를 달성하고도 남는 시간'에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물론 ‘게으름'보다 ‘미칠 듯이 바쁨'을 더 미덕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많은 작용을 했겠죠.
그래도 그렇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일을 더 하는 걸 선택하다뇨!!
지금처럼 국내에서 ‘조기은퇴, FIRE족'이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기 전에 우연히 해외 블로그에서 FIRE족에 대한 글을 읽고 조기은퇴를 한참 검색한 적이 있어요. 한국어로 된 검색결과는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비자발적 조기은퇴에 대비한 보험/저축/투자에 대한 내용이거나 ‘조기은퇴한 사람들은 결국 우울증에 걸린다더라'와 같은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때 일에 매진하던 사람들이 결국은 무료함과 무의미를 견디지 못해 일에 복귀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마치 일을 빼면 삶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는 것처럼요. 언제부터 우리는 그저 재미있게 노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요. 어쩌다 한 번 있는 이벤트로서의 놀이 - 퇴사하면 세계여행 가야지! 평일에 쉴 수 있으면 실컷 자야지! -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재미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나를 곱씹게 됩니다.
예전보다 여유시간이 많아진 지금, 힘겹게 얻어낸 자유인데 저는 여전히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넷플릭스를 보거나 주말이면 여기저기 카페를 다니거나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넷플릭스와 카페와 쇼핑몰이 문제라는 게 아니에요. 콘텐츠와 미식과 아름답고 쓸모 있는 물건에 열정과 기쁨을 느끼는 분들이 분명 있겠죠. 단지 저의 경우에는 그것이 저를 즐겁게 하지 않는데도 습관적으로, 혹은 그 외에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사실 재미를 탐구하는 데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해야 할 일과 주어진 역할에 치이다 보면 노는 데에까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그래서 쉽고 즉각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손을 뻗게 되죠. 모로 누워서 핸드폰을 무한 스크롤 하는 것이 저의 취미생활이 된 데에는 아마 그런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언제부턴가 과정의 수고로움이 재미를 추구하지 않을 핑계가 되어버렸어요. 바닷가에서 몸을 풍덩 담그고 노는 재미보다 그 잠깐의 시간을 위해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온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불편한 샤워시설에서 몸을 씻거나 흠뻑 젖은 채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집니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에 스노보드를 매고 새벽 보딩을 다녔었는데, 지금은 스키장 하면 ‘어우, 추워'라는 생각부터 들고요.
바닷가에 가고, 스키장에 가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 이외의 모든 행위들이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어려서부터 언제나 좋아하던 일이었는데, 요즘은 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재미를 느끼기까지의 과정이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조금 덜 즐겁지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훨씬 손쉬운 대안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에요.
많은 것들을 좀 더 편리한 것으로 대체하거나, 돈으로 해결하거나, 포기해 버리는 사이에 제가 잃어버린 재미가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면 조금 아깝습니다. 재미를 탐구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완전 방전이 될 때까지 ‘해야 하는 일'에 나를 소진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하고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있는 일이나,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애써서 하거나, 별다른 계획 없이 시간이 남을 때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겨울이라 땅이 얼기 전에는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일 때까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식물을 가꾸는 일에 몰두했어요. 집 안에서 남편이 창문을 열고 ‘이제 그만 들어와!’라고 소리칠 때까지요. 이런 경험은 초등학교 때 날마다 저녁까지 놀이터에서 놀던 저를 엄마가 잡으러 오던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
겨울에는 따뜻한 이불을 배까지 덮고 뜨개질을 합니다. 잘못 떠서 푸르고 또 푸르면서도 여러 가지 도안을 들여다보며 뜨개질을 하는 게 재미있어요. 결과물은 언제나 비용, 시간, 완성도 어느 측면에서 보나 사서 입는 것만 못하지만, 상관없어요.
‘재미있겠다. 나중에 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야금야금 모아두는 것들을 보면 대개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북바인딩을 한다든지, 나무로 작은 소품을 만드는 것들이요. 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결과물은 거의 어김없이 별로예요. 하지만 손을 놀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들이 저는 재밌습니다.
디지털 기반의 일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업무에서 즉각적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철저히 효율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인지 업무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오랜 시간의 비효율적인 삽질 끝에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는 활동’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하는 취미생활이 아니어도 스스로에게 재미를 주는 것들을 일상에 더할 수도 있어요. 저는 식물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튤립과 프리지어 구근을 사려고 가드닝몰을 들락거리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어요. 이것들을 어떻게 배치해서 심을까를 궁리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구근을 성공적으로 키우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이런 일들을 좀 더 일상에 많이 채워 넣어야겠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찾아보세요. 빈 시간을 즉각 채우려는 욕망을 멈추고 한번 잘 관찰해 보세요. 내가 어떤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시키지 않아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는 것만큼이나 열심히 재미를 계획해 보세요. 생각하는 내내 기대감에 즐거워하면서요.
술을 종류별로 마셔보든, 온갖 소재의 양말을 탐닉하든, 넷플릭스 새로운 콘텐츠를 도장 깨듯 해치우든, 아무 할 일이 없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든, 그저 뭘 하든 당신이 재밌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추구형 인간,
케잌 드림
덧붙임. 어렸을 때는 두꺼운 쿠션을 두세 개쯤 등에 받쳐놓고 앉아서 만화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feat. 귤). 동네에 책과 비디오 대여점이 있던 시절(옛날사람),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최대 권수를 가득 채워 집에 들고 와서 단숨에 읽어 버렸죠. (참고로 저는 대충 읽고 휙휙 넘기는 스타일이고, 동생은 말풍선 밖에 있는 지문까지 글씨란 글씨는 하나도 빠짐없이 읽는 스타일이었어요. 제가 1권을 선점하는 게 중요했어요. 동생이 다 읽고 전달해 주길 기다리다간 답답해서 단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주말엔 만화를 찾아봐야겠어요! 요즘은 뭐가 재밌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