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은 팔자에 없던 ‘개발자 모드'에 풍덩 빠져서 시도 때도 없이 개발 코드를 들여다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개발 문서들 사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엉덩이에 쥐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앉아서 온갖 문서를 들여다보고, ‘이제 됐다! 드디어 알았어!’하고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엔 ‘모든 게 망했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아'의 좌절을 경험하길 반복했어요.
회사에서 데이터를 집계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개발자의 도움이 필요해서 업무요청을 했는데, 문제는 저는 개발을 1도 모르고 개발자는 제가 사용하는 데이터 분석툴을 전혀 모른다는 거였어요.
저는 마케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제가 찾아낸 개발 가이드를 전달해 주었지만, 그걸 본 개발자는 ‘뭘 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어요. 어쨌든 되는 대로 한번 해봤다는데 데이터는 전혀 집계가 되지 않는…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치고 펄쩍 뛰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개발용어라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 좀 더 명확하게 업무 요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초 공부를 시작했어요. 제가 애초에 문과인 이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던 나날이었습니다.
업무를 하면서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 이슈로 밤새 골머리를 앓은 적은 많지만, 기존에 해왔던 업무는 ‘이만하면 됐다'와 ‘완성도를 높이자' 사이에서 자기만의 싸움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하지만 개발은 ‘작동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여서 ‘대충 작동하니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할까?'가 안되더라고요.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온갖 자료를 찾아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테스트를 해보고 데이터가 집계되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배포 버튼을 누르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내일 새롭게 시도해 볼 방법들을 메모하며 연말연시를 보냈습니다.
저는 업무에 과몰입을 잘하는 편입니다. 예전 상사 중 한 분은 저에게 ‘눈앞에 문제가 보이면 정신없이 뛰어드는 타입'이라며, 좀 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해 주신 적이 있어요. ‘회사일 고민하는 에너지의 반 만이라도 자기 인생에 대해 고민해 봐라'라고 하기도 했고요.
회사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틈만 나면 말하면서도 매번 이렇게 업무에 푹 빠져서 과몰입하는 저를 보면 저도 의아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라고 생각했어요. 인정받는 것의 달콤함 때문이기도 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높이 추켜올려 둔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때문이기도 하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에서 오는 희열 같은 것도 한몫했겠지요.
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요즘 저는 업무에 과몰입하는 이유가 실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을 좋은 핑계'를 스스로에게 마련해 주기 위해서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성실히 수행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일)을 계속 미뤄두고 있거든요.
하고 싶은 일은 아무리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잘하고 익숙한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정답이 있는 일도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또 실패했을 때의 상처도 더 클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결국 언제나 ‘좀 더 나아지는’ 쪽은 회사 업무를 하는 저입니다.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조금씩 성과를 쌓아가고, 기대에 부응하는 회사인인 저의 반대쪽에는 언제나 기대를 무너뜨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제가 있습니다.
회사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새로운 도전도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스스로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할 건 또 뭐야,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말해주고 싶어요. 결국 네가 계속해서 선택하는 일이 네 인생이 되는 거라고. 바구니 안에 사과를 가득 채우면서 그게 초콜릿 바구니가 되길 바랄 순 없는 거라고요.
다행인 건 인생은 개발 코드 짜는 것과는 달라서 ‘되거나, 안 되거나' 보다는 ‘대충 이 정도면 됐지' 선에서 합의할 수 있다는 거겠죠! 2024년에는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많이 채울 수 있는 한 해면 좋겠어요.
행복한 2024년 보내세요.
복 잔뜩 받는 한 해 되시고요!
케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