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저는 정원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방금 싼 듯 신선한(?) 배설물이 정원 곳곳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어요. 사이즈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포유류의 배설물이 확실해 보였고, 저는 옆집 강아지를 의심했습니다(미안!).
저의 어설픈 지식으로 ‘고양이는 배설물을 반드시 묻어 감춘다'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냥이는 애초에 의심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이죠. 옆집 정원과 저희 집 정원 사이의 작은 울타리는 여기저기 틈이 많아 맘만 먹으면 넘어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저의 의심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옆집 강아지의 범행 루트와 시각을 혼자 추측해 보고 있을 때 진범이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옆집 강아지보다 훨씬 큰 풍채의 삼색 고양이었어요.
조심성 많은 삼색이는 처음엔 제가 놔둔 밥그릇과 물그릇에 손도 대지 않고, 츄르로 꼬셔봐도 가까이 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씩 다가와 사료를 먹기 시작했고, 이제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꽤 규칙적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갑니다. 게다가 밥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정원 어디를 봐도 배설물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저희 집은 길냥이 공중 화장실에서 식당으로 업종전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톨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저희 가족 모두 조금씩 이 삼색 고양이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톨톨이가 와 있는지 확인하고, 식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으면 궁금해하고요. 톨톨이도 저희 가족에게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남편은 톨톨이가 오면 괜한 심술로 손을 휘휘 저으며 탈춤 비슷한 것을 추는데, 처음에는 크고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라 경계를 하던 톨톨이가 이제는 흘끔 쳐다보고는 먹던 밥을 계속 먹거든요.
비가 내리고 날이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톨톨이가 걱정되어 작은 집을 만들어주려는데 마땅한 크기의 상자가 없었어요. 톨톨이가 한 덩치 하기 때문에 웬만한 상자로는 안되거든요. 집에 있는 상자를 모조리 꺼내어 이게 맞을까.. 고민하는 저를 무심하게 보던 남편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는 길에 톨톨이 몸집에 딱 맞는 상자를 주워왔습니다.
조심성 많은 아이가 여기 과연 들어갈까, 싶은 걱정을 하면서도 방한 뾱뾱이를 꼼꼼하게 붙이고, 따뜻한 무릎 담요를 깔아 톨톨이 밥그릇 앞에 두었는데, 세상에 어느 순간 보니까 그 안에 쏙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저녁을 먹고 나면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을 잡니다(숙박업 추가!).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할 정도의 책임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저는 이렇게 톨톨이에게 약간의 마음을 내어주며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을 건네며 지내고 있습니다. 얼굴을 알게 되고, 이름을 알게 되고, 한 덩어리가 아닌 개체로 인식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길냥이는 톨톨이가 되고, ‘다음 세대'는 제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눈돌릴 수 없는 존재들이죠.
나이가 들면서 제가 품을 수 있는 ‘우리'의 범위를 넓혀가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 챙기기에도 바빴던 저에게 돌봐야 할 가족이 생겼고, 지금은 ‘우리 가족'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아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제가 ‘의리게임'의 한 명의 주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잔에 가득 담은 술을 각자 양껏 마시고 넘기면 마지막 주자가 남은 술을 모두 마셔야 하는 몹쓸 술자리 게임이요. 제가 여태껏 삶을 살던 방식은 제 앞에 온 술잔에 입술만 살짝 댄 채 뒷사람에게 넘기는 것이었어요.
저는 어떤 그룹도 대변하고 싶지 않았고, 제 앞가림을 하는 것 외에 저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습니다. ‘무슨무슨 세대'로 스스로를 인식한 적도 없고, 직장 내에서 ‘일하는 선배 여성'과 ‘워킹맘'의 한 본보기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라면서 부당하다고 느꼈던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혹은 삶의 조건들이 제가 겪었던 것보다 더 팍팍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것이 제가 입만 대고 술잔을 넘겨버린 결과가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 끝에서 여전히 무거운 술잔을 힘겹게 받아내야 하는 사람들 중에 제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저의 안온함만을 생각하는 삶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제가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저와 한 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제가 떠난 다음에 이어서 살아갈 사람들, 그리고 비인간동물들에게 마음을 조금 떼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지면 좋겠다고요.
저는 속이 좁고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많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하자고, 두어 모금쯤은 더 삼킬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자고요.
추운 겨울, 아무쪼록 따뜻하게 보내시길.
톨톨이 단골 식당겸 여관주인
케잌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