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한 만큼 전달드리지 못해서, 저에게 실망하셨을 것 같아요'
얼마 전 누군가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해서 조금 놀랐습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감정을 느꼈지만, 사실 실망감은 크지 않았거든요. 답답하고, 좌절스럽고, 짜증 나고, 힘들고, 난감하고, 피곤하고 등등 많은 단어가 있는데 하필 왜 ‘실망'이라는 말을 선택한 걸까요?
실망은 기대를 전제로 하는 감정이잖아요. 저는 위의 말을 한 상대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어요. 저분을 얕잡아 본 것은 전혀 아니에요. 다만, 어떤 일을 실현시켜 줄 거라고 그에게 미리 걸어둔 특정한 기대가 없었다는 겁니다.
‘프로젝트가 잘 되면 좋겠다’, ‘잘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강했지만 ‘잘 될 것이다'라고 미리 기대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잘 안 됐을 때 힘들긴 했지만 그게 실망을 불러오진 않았어요.
제가 실망했을까 봐 걱정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제 모습이 많이 겹쳐 보였습니다. 실망감은 제 삶에서 아주 중요한 감정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온 기간이 길기도 하고, 어릴 때는 완전무결한 것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혹독했던 것 같고요. 제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무작정 동경하는 마음도 컸어요.
‘저 사람은 대단하니까, 나 같은 고민은 안 하겠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겠지?’
‘내가 이 프로젝트만 성공시킨다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
하지만 막상 겉에서 보는 것과 조금 알고 나서의 모습은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냅다 기대해 놓고, 그게 제 기대와 다를 때 많이 당혹스러워했어요. 쉽게 기대를 걸고 그만큼 쉽게 실망했습니다.
'뭐야, 알고 보니 별 거 아니네.'
'겉과 속이 많이 다르네.'
'분명 계획대로 했는데, 왜 결과가 다른 거지?'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어김없이 실망하는 걸 반복하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금은 예전만큼 크게 실망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제가 이해하는 인생의 기본값 같은 것이 변경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게 그다지 없다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어요.
기대는 소망일 뿐 근거가 없어요. 쉽게 기대하고, 실망하기엔 제가 어떤 것도 확실히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성격 멀쩡한 사람 없다는 것이 제가 알게 된 인생의 ‘진실'이고요.
누구라도 실망스러운 구석이 있고, 저 역시 100%의 확률로 누군가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게 기본값입니다.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더라,라는 사실이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라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봤더니 계속해서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거야 말로 펄쩍 뛰고 놀랄 일이죠.
게으른 사람이 지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지루하고 별 거 없는 게 인생이고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의 기본값은 실수하고 얼마간은 실패할 것이라는 거예요.
불완전함이 저의 본성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구리고, 삶은 불공평하고, 사람들은 다 별로라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뭐든 조금씩 부족한 것이 당연한 기본값이니까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보자는 거예요. 좀 더 나은 방향을 소망하되, 그게 원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는 조금 낮춰보는 걸로요.
실망은 어른이라면 반드시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요즘도 일상적으로 실망하지만, 예전만큼 마음이 무너지도록 실망하는 일은 줄었습니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하고 실망에 허우적대는 대신 (오만 짜증을 내며) 수습하거나 도망갈 방법을 찾아요.
근데 뭐, 말이 쉽지 어디 항상 맘대로 되겠어요? 실망을 안 하려고 했는데 실망을 해서 실망인 날도 있겠죠. 그래도 조금 덜 실망해 보자고요. :-)
글을 좀더 잘 쓸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운’
케잌 드림 |